초기 앵글로색슨의 정신세계에서의 말

중세사 2023. 1. 23. 01:35 Posted by medievalart_kr

 

 

(*해당 포스트는 Chris Fern의 Horese in Mind을 트위터 포맷에 맞게 발췌하고 문장을 이어붙이고 의역했던 내용입니다.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싶어 따로 재번역하지 않고 올립니다.)

 

초기 앵글로색슨의 정신세계에서 말은 사회정치적,영웅적,영적 모티프로써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매장지에서의 말 희생과 공예품,말-인간 조상의 건국신화와 거기서 내려오는 왕들의 혈통이 그 예다.말 도상과 말에 대한 종교적 의식은 기독교 이전 이교신앙의 주요 요소로 추정된다..이러한 주제는 헹기스트(종마)와 호르사(거세마) 전설에서 가장 극적으로 결합한다.헹기스트-호르사는 전쟁마에 탄 지도자의 구현이며,동시에 반인반마의 개념을 내포한다는 주장이 있어왔다.앵글로 색슨의 기원을 신화적으로 설명한 형제의 전설은 아마도 대이주 시대의 구전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

문헌은'헹기스트와 호르사 숭배'의 존재에 대해 제한적인 증거만 제공하지만,고고학과 미술사학은 말 신앙이 상당한 규모의 열정으로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매장 관습,브로치와 도자기에 말 모티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며,이 도상,신화의 많은 부분은 그 원천을 대륙 게르마니아의 북부와 남부 스칸디나비아로까지 추적할 수 있다.보다 넓은 유럽적 맥락에서,말은 샤머니즘적 믿음과 연결되어 있으며 수호동물이자 사후 세계로의 운송 수단으로 여겨졌다.그러므로,앵글로 색슨의 말 신앙은 섬 고유의 특이성을 띄고 있지만,또한 범게르만적 우주관의 일부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앵글로 색슨 영국에서 말을 이용한 제의 의식이 사라지는 현상은 고대 후기 기독교 철학과의 양립 불가능성,그리고 4세기 후반 제국의 짐승 희생의식 금지의 반영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이교신앙의 근본적인 신화와 관념은 헹기스트와 호르사 전설과 같이 살아남았고,8세기에 기록되며 흔적을 남겼지만,교회의 영향으로 다소 무색의,과묵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말 신앙은 게르만 문화에 고유한 것은 아니며,신석기 시대 인도-유럽어족 사람들의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 둘 다에서 증명된다.보통 창작 시기가 기원전 8세기로 소급되는<일리아스>에는,파트로클로스를 위한 미케네식의 장례에서 네 마리의 말이 희생된다.그러나 이러한 말 희생 의식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기원전 10세기~기원전 4세기의 스키타이-시베리아 민족의 것일텐데,가장 웅장한 무덤에는 수십마리의 말 유해가 묻혀 있다.

말 제의 의식,말 신앙은 기마 유목민족을 통해 초기 중세 시대에 대초원 전역에 널리 퍼졌다.이들 중 괄목할 만한 것은 사마르티아인,훈족,아바르인과 헝가리인으로 세기 초에 카르파티아 평원에 연속적으로 침입했다.훈족 사이에서 승마의 중요성은 여러 로마 저술가들이 주목한 바,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들이 마치'반인 반마인 것처럼'거의 말에 딱 붙어 있었다고 증언한다.유럽 켈트족과 게르만 민족의 말 도상과 말 제의는 이러한 동쪽 민족들에게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높은데,중세 초기의 스텝 안장,등자 그리고 카프탄 겉옷을 포함해 여러 승마 기술이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서방으로 들어왔다.
타키투스는 서기1세기경에 라인란트의 게르만족이 장례의식으로 말을 희생하는 의식을 치뤘으며 말의 유해로 점을 쳤다고 한다.그러나,로마인들 역시 말 신앙을 지녔다는 증거가 있다.갈리아-로마의 말 여신 에포나는 서방 지역의 기병 부대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뿐만 아니라,말 희생 의식은,스칸디나비아 부족 사회에서도 청동기부터 바이킹 시대까지 끊이지 않고 전해내려온 전통의 한 측면이었다.잉글랜드에서도,묘지와 정착촌 유적에서 종종 발견되는 말 매장의 흔적은 기독교이전,로마 이전의 것이며,최근의 연대 측정 결과는 어핑턴의 백마 지상화가 청동기 후기/초기 철기 시대에 그려졌다고 추정해 이 시기부터 말 도상이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핑턴의 백마 지상화


이러한 ‘말 신앙’들이 근저로 하는 것은,사람과의 관계에서 말이 갖는 특수한 지위라고 할 수 있다.관리에 많은 비용이 들며,사냥,전쟁,여행과 뗄 수 없는 관계인 말은 유럽 문화의 이른 단계부터 승마를 높은 지위,권위와 동일시하는 데 활용되었다.로마 사회에서 귀족이 에퀘스 로마누스(기병)로 표현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고대 로마 저술가들은 말이 전쟁을 타고난,충직하고 지적인 동물이라 믿었으며,또 마찬가지 이유로 로마인들은 말고기를 역겹게 보았다.

 

장례식에 부장된 말,화장된 말 그리고 정착지
 
초기 중세,말들은 높은 정치적 의의를 지닌 인물들을 동행하기 위해 장례식에서 살해당했다.서기 482년 벨기에 투르네에서 킬페릭은 말 머리와 함께 묻혔고,그 무덤을 이십여 마리의 희생된 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스웨덴의 감라 웁살라에서도 말들과 여러 다른 희생 동물이 부장된 봉분이 있어 어떤 왕권이 감지된다.

킬페릭의 무덤 재구성도


5세기부터 7세기까지 말 매장 풍습은 알라마니,바이에른,롬바르드,라인란트 프랑크,작센과 튀링겐을 포함해 라인강 동안에 널리 퍼져 있었다.말 매장 풍습의 단일 근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는데,적어도 로마 시대부터 스칸디나비아 남부와 게르마니아 모두 이러한 희생 제의를 행하고 있었다.그럼에도,아틸라의 정치적 지배 기간에 훈족의 관습이 프랑키아와 스칸디나비아의 말 장례 의식에 새로운 추진력을 주었을 수 있다.
앵글로 색슨은 고인과 함께 말을 매장하는 관습,고인과 말을 함께 화장해 하나 이상의 항아리에 안치하는 관습이 모두 있었는데,보고된 말 화장의 예는 수백마리가 넘으며 그중 다수는 2000개가 넘는 무덤이 있는 단 한 곳의 공동묘지(노포크 스폰힐)에서 왔다.온전한 말 매장은 드물며, 그 사례는 32건에 불과하다.물론 여기는 지역적 차이가 존재한다.말 화장 장례는 주로 북부 노퍽에서 험버 하구까지의 지역으로 제한되고,말 매장 장례는 이스트 미들랜드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가장 흔하다.전체적으로,말은 장례식에서 가장 자주 희생되는 동물이었다.
대륙 말 매장(700개 이상이 보고되어 있다)은 전형적으로 청동 용기,칼과 같은 귀중품을 갖는 성인 남성 매장을 동반하는데,이는 앵글로색슨도 마찬가지다.가장 호화로운 예는 서튼 후의 17호 무덤과 에리스웰의 4116번 무덤인데 금박을 입히고 동물 도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마구가 출토되었다.
마구는 좀 더 평범한 다른 무덤에서도 발견되는데,여전히 상대적으로 드물지만,이러한 발견은 앵글로 색슨 시대 잉글랜드에 엘리트 승마 문화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입증한다…..유틀란트,작센 지방과 슐레스비히-홀스타인 같은 '앵글로색슨의 고향'땅에서는 규모에서 영국의 말 화장 장례와 비견할 만한 것이 없으며,오직 이주 기간 동안 적은 수의 무덤만 보고된다.따라서 이러한 말 화장 관습은 북게르만족의 것이 아니라,정착한(아마도 2~3세대)지역 인구의 관습임을 스폰힐에서 추론할 수 있다.말 화장 장례 지역은 현지의 영향을 받은 인장 유물,도자기 유물이 우세한 지역에서 지배적이고,1세대 이주민들과 관련된 중앙 지역 매장지에서는 떨어져 있다.이것은 6세기부터 말 화장 지역에서 대륙과 뚜렷이 구분되는 섬 특유의 말에 대한 관념이 발달했음을 시사한다.

6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잉글랜드에서 말을 고인과 함께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예식은 희귀한,엘리트 독점의 장례방식이었다.(여러 마리 말이 희생된 서튼 후의 '왕족'무덤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서튼 후 묘지는 물론 배 무덤으로 가장 유명하지만,이 또한 엘리트 승마 문화의 암시일 수 있다.

서튼 후 매장에 나타난 상징주의

앵글로 색슨의 고대 영시에서,배는 sund-hengesta(바다 종마)와 yo-meares(파도 준마)로 묘사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게르만 동물 도상은 그 우주론적 중요성이나 연대기적 발달에 따라 연구된 바 있다.멧돼지,용,독수리,물고기,갈가마귀와 늑대,바다뱀에 비해 말은 도상에 덜 나타나지만,그럼에도 이 시기 스칸디나비아 예술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동물 도상은 1번 스타일과 2번 스타일로 나뉘며,양쪽 모두 남부 스칸디나비아에서 유래했다.7세기부터 무기와 마구,보석 등을 장식한 동물 도상은 정치적,사회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지배와 권력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엘리트의 독점물이 되었다. 동물 예술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그것이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가졌는지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동물 예술의 추상적 형태는 그 내러티브를 해석하는 데 장애물로 보인다.그러나..추상화와 도식화는 그 시대 의도된 청중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모티프의 기호였을 것이다.
또한 게르만 동물 양식의 추상화는 내러티브에의 접근을 제한하기 위한 의도적 전략이었을 수 있으며'교육을 받은'감상자에게는 심리적 깨달음을 가져왔을 것이다.아마도,동물 예술의 의도된 레퍼런스는 범게르만적 신화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게르만 동물 도상이 기독교-지중해 미술의 자연주의에서 벗어난 것은 비기독교적 미학을 창조하기 위한 의식적인 시도였을 수 있다.

1번 스타일은  Tiermenschen(동물-인간)모티프의 반복이다.헬맷을 쓴 인간의 머리에 네 발 달린 동물의 사지를 지녔으며,회전 혹은 '거울상'을 만든 후에 해석할 수 있다.의미심장하게도,이 초기 맥락에서,앵글로 색슨의 동물-인간 모티프는 헹기스트-호르사 등식과 평형을 이루는 것 같다.

‘이중 말 모티프’의 초기 증거들은 로마 붕괴 직후의 주조 장식물,청동 버클들을 포함한다.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반 사이에 브리튼에서 제조된 버클들은 말머리 쌍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며 다양한 정도의 자연주의 경향을 보인다.버클들은 브리튼 섬에서 제작된 것이긴 하지만,한 쌍 말머리 모티프는 아마도 로마-라인 국경,그리고 남부 스칸디나이바와 프랑키아 금속세공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그러한 예로,프랑스 지베르빌에서 출토된 4세기 혹은 5세기경의'반다이크'술잔이 있다.

영국의 버클들은,출토지의 분포로 볼 때 토착 민병대를 시사하기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이것을 게르만 용병 포에데라티의 상징으로 곧장 식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하지만 군사적 맥락 위의 말 도상은 분명히 로마-야만인 사이 정체성 시기의 한 징후였다.
앵글리아에서 출토된 게르만식 브로치에서도 강한 수준의 문화적 융합이 암시된다.이 브로치는 로마식 석궁형 브로치의 변형이며 결정적으로 말머리와 발판 장식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타입 브로치는5세기 초반 남부 스칸디나비아와 북독일에서 도입되었고,잉글랜드에서는 켄트에서 요크셔까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길쭉한 말머리는 튀어나온 눈,과장된 콧구멍 등으로 심하게 양식화되었다.이 마지막 세부 사항은 '넓은 콧구멍'을 이상적 말의 조건으로 인용한 4세기 로마 수의학을 연상시킨다.또한,호흡을 돕고 말의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콧구멍을 째는 앵글로 색슨 관행을 고려할 때 흥미롭다.대륙의 고향에서와는 달리,앵글로-색슨 잉글랜드는 일반적으로 양어깨에 두 브로치를 쌍으로 착용했다.부분적으로 이것은 페플로스형 의상을 고정하기 위해서였지만 이 브로치의 쌍착용은 '헹기스트-호르사'모티브를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다음 이미지는 한 쌍 말 모티프를 잉글랜드와 (유럽)대륙 도상에서 식별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이 이미지는 종마간 전투에서 파생되었으며, 양식화를 거쳐 최종적으로 문화적 기호로 자리잡았다(시간순이 아님에 주의).e도상의 경우,형식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웨스트 서식스 애플다운에서 출토된 브로치의 선례(d)가 없었더라면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서튼 후에서 출토된 또다른 투구는 두 개의 반복되는 형상을 보여준다.하나는 말을 탄 기수로,작은 인물에 의해 지지되며,말발굽으로 적을 짓밟는다.두 번째는 쌍둥이 형상으로 승마용 카프탄 덧옷을 입고 창을 휘두르며 춤을 춘다.

기수의 형상은 대륙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양쪽에서 출토되지만 그 기원은 로마 승리의 도상일 것이다...

로마 주둔군의 묘비석에 나타난 도상

투구의 기수는 그 의미가 뚜렷하게 파악되지 않았지만,영웅적 신,조상의 이미지일 확률이 높다.그러므로 앵글로 색슨적 맥락에서 헹기스트와 호르사 전설의 레퍼런스일 가능성이 있다.여기서,게르만 신화와 정치적 야망을 설파하기 위해 로마 모티브(승리와 귀족적 승마주의)인 기수의 형상은 조작되고 변형되었다. 

...말을 탄 인간의 형상은,반인반마 신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 그가 타고 있는 종마와 섞여 변형되었을 것이며,이러한 맥락에서 기수는 오딘,혹은 토르로도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말의 상징주의 중심에는 앵글로 색슨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형제인 헹기스트와 호르사가 있다.형제는 저명한 이교 신 보탄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헹기스트 쪽은 켄트 왕통의 건립자이다.헹기스트는 고대 영어로 남성 명사이며,그 의미는 종마에서 거세마,준마,말 등으로 다양하다.그러나 현대 독어와 네덜란드어로 Hengst는 분명히'종마'이며,이것이 원래 의도했던 의미였을 가능성이 높다.Hors는 고대영어에서 '말'의 중성명사이지만,이 맥락에서 '종마'와 짝을 이루기 위해 거세된 말의 의미를 유도했을 가능성이 있다.헹기스트-호르사 전설의 가장 이른 기록은 비드의 '앵글인의 교회사'이지만,아마도 기독교화 이전 5세기와 6세기 구전 전설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것이다.다른 7왕국 전설들과 마찬가지로,헹기스트 형제의 전설은 의심할 바 없이 허구적 구성물이다.그러나 이 전설들은 왕들의 계보와 비드의 역사서에 통합될 만큼 앵글로-색슨 사회에서는 신뢰할 만하고, 중요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짧게 말해,초기 중세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유사역사적 영웅들을 통해 왕조적 정통성을 주장했다.

쌍둥이 영웅 숭배는 인도-유럽어계 민족 사이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폴룩스와 카스토르,로물루스와 레무스는 그러한 쌍생아 숭배의 예이다.그리고 그 이전에 반은 신성이고 불멸하지만 반은 필멸자인 쌍마-영웅의 이미지는 기원전 2세기 스파르타의 디오스쿠로이, 그리고 기원전 13세기 인도 리그베다의 아슈빈(쌍둥이 기병 형제)에 잘 드러나 있다.긴 머리를 한 기마 형제 모티프는 5세기 스칸디나비아에 도달했고 브로치와 무기 등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며,오딘의 아들들인 비다르와 발레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또한,앞선 시대 로마 군대에서 장교계급을 형성했던 부유한 에퀘스 로마누스 계층은 군사적 컨텍스트에서의 승마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헹기스트는 '베오울프'에 언급되어 있으며 이 언급은 '핀네스버그 파편'(고대 영시)과 연관되어 있다.유틀란트 인 영웅 헹기스트의 존재는 앵글로 색슨의 헹기스트와 호르사 전설이 유틀란트 기원일 가능성을 시사한다.비교적 최근(19세기)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 전통도, 이 오래된 문화적 연결고리의 반영일 수 있다. 이 지방에서는 농가에 교차된 말머리 박공을 새기는 풍습이 있으며 이 말머리들은 Hengst와 Hors로 불렸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교차된 말머리 박공

이 시기 스칸디나비아 남부 기원은 고트,롬바르드를 포함해 게르만계 민족 사이에서 공통된 주제였는데 이는 서로마제국의 붕괴이후 남부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중요해졌기 때문이며 그 지역의 동물 모티프와 신화 등은 지방 권력관계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채택되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북유럽의 우주관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무덤터의 수많은 말 화장은 동시기(대이주 시기)대륙의 화장터와 비교를 불허하며, 섬 지역 앵글로 색슨의 활발한 말 문화를 시사한다.서튼 후 유적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7세기에 말 매장은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 되었다.이것은 앵글로색슨 상위 계층이 왕실 계보에 신성한 말을 포함시키는 단계까지 나아갔다는 현상의 반영일 수 있다.이러한 증거들을 종합하면,기독교 이전 앵글로 색슨 종교에서 말이 중요했다는 중대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으며,이는 8세기 노섬브리아에서 제작된 고래뼈 상자(프랑크 상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프랑크 상자(뚜껑)

이 유물은 게르만 전설과 기독교 에피소드들이 복잡하게 얽힌 세계관으로 장식됐으며 의심할 바 없이 엘리트 후원자를 위한 선물이다.말의 도상은 여기서 2개 에피소드에 등장하며 난외를 메우는 장식적 역할도 하고 있다. 후면 패널은 AD70년 유대-로마 전쟁의 예루살렘 함락을 보여준다.

중앙 모티프는 티투스 군대에 의해 포위된 솔로몬 성전이며,성전 안에는 언약궤가 있다.그러나 앵글로 색슨적 재해석을 통해 일반적으로 성소를 지키는 케루빔은 게르만적 4마리 독수리로 대체되었으며,언약궤는 한 쌍의 등을 맞댄 말 위에 얹혀 있다.(그들의 갈기는 명확하게 그려져 있다)수도원 아틀리에의 작업물이긴 하지만, 이 새와 네발 달린 동물(말)모티프를 6세기 수많은 브로치와 버클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말은 그 의미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오른쪽 패널의 중심 모티프이며 이제는 '잃어버린'게르만 전설을 그리고 있다.


이 패널의 텍스트는 그녀의 적대자인 Ertae에 의해 추방되어 슬픔과 고통의 비참한 소굴인 '슬픔의 고분'에 기거하게 된 Hos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왼쪽에는 말 머리에 멧돼지 턱을 한 반인간 Hos가,굴 위에 앉아 잎사귀가 난 가지를 휘두르며 전사(아마도 Ertae)와 마주하고 있다.

그 다음 장면은 황무지의 골풀과,'깨무는'가시나무에 둘러싸인 숫말을 묘사하고 있다.전경에는 또 다른(혹은 같은)굴 안에 수의에 둘러싸인 인영을 묘사하고 있고,그 옆에는 '막대기와 잔'을 들고 망토를 입은 인물이 서 있다.마지막 장면은 망토를 입은 두 인물이 세 번째 인물을 붙잡고 있다.
웹스터는 이 패널이 광야와 추방의 이미지를 다루는 것으로 보았고,자비에서 망각된 기독교적 컨텍스트가 있다고 추측했다.그러나 이 유물의 게르만적 에센스는 좀 더 탐구할 가치가 있다..의미심장하게도 Hos는 앵글로 색슨 신화에서 또 다른 반인간,반동물 캐릭터이다. 고분,잎이 달린 나뭇가지와 나란히 병치되는 것은 동물을 통해서,혹은 동물로 변해서 죽은 조상과 대화하며 산 자를 치유하는 그녀의 샤머니즘 성격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이 해석을 따른다면 패널의 새와 말은 영혼들과 대화하는 장면의 표현일 수 있다.기독교 이전 앵글로 색슨 종교 측면에 대한 탐색의 가능성은 여러 학자들이 탐구한 바 있다.
의미심장하게,말과 새는 먼 거리를 이동하는 능력-사후세계로 가는 데 필요한-때문에 이상적인 영적 상징물이며,그 중에서도 종마와 사냥매는 그 ‘고귀함‘때문에 매력적인 영적 수호 동물이다.몇몇 학자들은 스칸디나비아 신화의 오딘의 다리 여덟 달린 말 슬레이프니르가 샤머니즘적 승마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한다..

솅비더 화상석에 묘사된 슬레이프니르

..초기 앵글로색슨 컨텍스트의 헹기스트와 호르사 또한 이러한 흔적을 의미할 수 있다..그들은 동물과 인간의 요소를 결합할 뿐만 아니라,필멸하는 왕의 조상들의 세계와 오딘이 지배하는 우주 사이에서 우주론적 위치를 점한다.

고고학적으로 샤머니즘 숭배에 대한 증거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만,말 매장 관습은 몇 가지 매혹적인 세부 사항을 제시한다.안장마의 희생,그리고 죽은 자를 위한 식량은 내세로 떠나는 여행을 암시한다.거기에,말의 목을 자르는 행위는 샤머니즘적 관행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머리를 제거하는 행위는 아마도 그 동물의 영혼을 해방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앵글로색슨 교회가 동물 매장을 금지하는 시도를 했다는 증거는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말 매장 관습은 개종 이후 궁극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중단되었다.(다만 이 과정은 즉각적이기보다는 점진적이었을 것이다)
인간 중심적 우주를 강조하는 당시의 기독교 철학은 명백히 동물 희생과 숭배에 적대적이었다.아우구티누스는 저서에서 짐승은 비합리적이고 영혼이 없으며 인간에게 유용되고 지배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기독교적으로 보아 동물을 돌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지만 인간에게 주어져야 할 애정을 동물에게 돌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후기 고대 교회는 의식의 일부로서 동물을 희생하는 일은 비기독교 신에게 바치는 것을 암시한다고 보았다.기독교적 관념에서,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만이 유일하게 유효하며 정당한 제물이었다.
실질적으로 제국의 동물희생 컬트는 콘스탄티누스 치세에 종료되었으며 이는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공적 및 사적 영역에서 희생제물을 금지함으로써 보강되었다..6세기 동안 대륙과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말 매장 의식에 일어난 변화는,동물 제례에 대한 불안감 증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이것은 동물과 인간을 함께 매장하는 관습이 분리된 매장으로 바뀌는 양상으로도 표출된다.6세기 초 이리스웰 고분 4116과 거의 한 세기 뒤의 서튼 후 17호분을 비교해보면 마구만 묻힌 것으로 드러나며,7세기 중반 이후로는 잉글랜드에서 동물 희생을 포함하는 매장은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9세기~10세기에 바이킹의 영향으로 이 관습은 더비셔의 잉글비 화장터와 같은 곳에서 잠깐 재출현한다)6세기 초반 네우스트라시아 프랑키아에서 왕실 장례 의식이 변화된 것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추론할 수 있다.킬데릭의 무덤은 말 희생 의식이 치러진데 비해,개종한 그의 아들(클로비스)이 매장된 생드니 바실리카에서는 그런 흔적이 드러나지 않는다.기독교가 5세기와 그 이후로도 견고하게 남아있던 프랑크 심장부에서 말 매장 무덤이 거의 전무한 것은 라인강 동안의,기독교가 오랜 저항을 겪은 지역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개종이 8세기에서 11세기 걸쳐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프리지아,니더작센,튀링겐과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말 매장 무덤 관습이 오래 지속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그러나,기독교로의 개종이 기독교이전 관행을 즉시 근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6세기 후반에 공식적으로 개종이 이루어진 알라마니아에서는 7세기 후반까지 말 매장 관습이 계속됐으며 기독교의 금박 십자가 사용과 말 매장 관습이 공존한 기간이 있었다...

 

..말을 먹는 것이 앵글로색슨의 잉글랜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더 넓은 게르만적 관습이었다는 것은 앵글로색슨 선교사인 보니파키우스의 732년 편지에서 적시된다.보니파키우스는 튀링겐 사람들이 야생마와 가축으로 길들인 말을 먹는다고 보고했다.로마의 반응은"더럽고 가증스러운 관행"이며 그것은"가능한 모든 방법으로"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것은 흔히 말 희생을 포함한 이교도 의식에 대한,기독교적 적개심으로 해석되나 궁극적으로는 고전고대 로마의,말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오래된 혐오에 뿌리를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은 기독교 이전 앵글로 색슨의 잉글랜드에서 말고기를 먹는 것이 흔했다는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정착지의 동물뼈 군집은 말고기가 드물게 섭취되었으며,일상적으로 소비된 육고기의 5%미만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이 소비패턴은 기독교 로마 시대의 농촌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고기는 오직 말이 노동 수명을 마쳤을 때나 궁핍할 때만 섭취했을 것이다.그러나 정착지 안팎에서 발견되는 '특별한 뼈 무더기'는 말고기를 먹는 것이 세속적이라기보다는 신성한 의식일 수 있기 때문에 드묾을 시사한다.
그러한 의식은 최근에 이스트 요크셔의 멜턴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두 구덩이는 도자기와 여러 말 유해를 포함하고 있는데,말 유해는 머리와 발 부위로 대표되며 그중 하나는 방사성 탄소로 6세기와 7세기 중반 사이로 연대가 측정된다.이 유물은 말고기를 섭취하는 연회가 끝난 후 남은 머리와 발은 습지 호수 가장자리에 묻히기 전에 가죽이 붙은 채로 전시되었음을 시사한다..옥스포드셔의 크레스웰 필드에서는 침몰한 건축물에서 두 개의 말 두개골과 다섯 개의 말 턱뼈가 발견된다.언급한 대로,공동묘지에 매장된 말머리뼈는 무덤가에서 연회와 말 머리 전시가 벌어졌음을 암시한다.
머리와 발굽 의식은 청동기 시대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말 숭배의 의식이다.그러나 역사적 기록은 오직 로마와 바이킹 시대에 한해 남아있다.이 의식은 로마 철기시대의 스칸디나비아 동부・남부에서 가장 두드러지며 대이주 시대까지 지속된다. 스웨덴의 욀란드는 백마리가 넘는 말이 묻힌 장소로 유명하며 경마 및 종마간 싸움 붙이기와 종교적인 연회가 벌어졌다고 추정된다.


(결론부 생략)

17세기 플랑드르 전쟁화 모음

근세사 2023. 1. 22. 23:05 Posted by medievalart_kr

Peter Snayers(1592-1667), <키르홀름Kirholm, 1605>

 

 

Peter Snayers(1592-1667), <강도들의 습격을 받은 여행 마차>

 

 

Sebastiaen Vrancx(1573-1647), <민가를 약탈하는 군인>

 

 

Peter Snayers(1592-1667), <레커비테Lekkerbeetje 혹은 뷰트 히스Vught Heath에서의 결투>

 

 

Sebastiaen Vrancx(1573-1647), <레커비테Lekkerbeetje 혹은 뷰트 히스Vught Heath에서의 결투>

 

 

Sebastiaen Vrancx(1573-1647), <레커비테Lekkerbeetje 혹은 뷰트 히스Vught Heath에서의 결투>

 

 

Peter Snayers(1592-1667), <기병 척후부대의 충돌>

 

 

Joos de Momper(1564-1635)&Peter Snayers(1592-1667), <언덕에서 기병 척후부대의 충돌>

 

 

Peter Snayers(1592-1667), <기병전이 있는 풍경화>

 

 

Peter Snayers(1592-1667), <뤼첸Lützen 전투, 1632>

 

 

Peter Snayers(1592-1667), <마을을 약탈하는 군인들의 정경화>

 

 

Sebastiaen Vrancx(1573-1647), <무장강도의 습격/드로잉>

 

 

Esaias van de Velde (1587-1630)공방, <기병 척후부대의 충돌>

 

 

Esaias van de Velde (1587-1630), <야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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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카라콜Caracole 항목  (0) 2020.06.24

DAVID DOUGLAS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특히 <롤랑의 노래>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롤랑의 노래>에 대한 분석을 찾아왔을 학생들에게는 먼저 양해를 구한다.이 논고의 목적은 이 유명한 시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거나, 베디에 이후로 평론가들을 분열시킨 문학적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려는 것이 아니다.그 유일한 목적은,'과연 11세기 노르만의 역사가 <롤랑의 노래>를 이해하는데 얼마나 유효한가'를 논하기 위함이다.이 질문은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지만,여기서 제시될 근거들은 잠정적이거나 한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알아주기 바란다.

노르망디와 <롤랑의..>간 관계를 논하기 위한 적절한 시작점은 물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정복왕의 군대 앞에서 타유페르라는 음유시인이 '카를마뉴와 롤랑과 올리비에의'노래를 불렀다는 일화일 것이다.이 일화는 1160년과 1170년 사이에 집필된 와스Wace의 저서 루 이야기Roman de Rou에서 처음 완전한 형태로 등장한다. 다음과 같이:

 

Taillefer, qui mult bien chantout

Sor un cheual qui tost alout

Deuant le duc alout chantant

De Karlemaigne e de Rollant

E d'Oliuer e des uassals,

Qui morurent en Renceuals.

 

노래에 빼어난 타유페르는

발 빠른 말을 타고 나와

공작의 앞에서

카를마뉴와 로랑과 올리비에와

롱살보에서 죽은 봉신들의 노래를 불렀다.

 

이 문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첫째로,<롤랑의...>와 무관하게,타유페르라는 인물에 대한 접근이다.타유페르는 헌팅턴의 헨리(1150년경)와 가이마르(1140년경)의 저서에 언급되며,또 강철의 앞니Incisor Ferri라는 라틴어 이름으로 헤이스팅스 전투의 시Carmen de Hastingae Proelio에 언급된다.(이 저서는 원래 적어도 1068년 전에,아미앵 주교인 기가 집필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12세기 초중반이 더 유력시되고 있다)한편 타유페르는 가상의 인물로 취급되기도 하는데,그것은 기욤 푸아티에가 타유페르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어쨌든,타유페르는 지금 우리가 다룰 논점과는 거의 연관이 없다.

다른 한 가지 측면,즉 이 일화가 와스에 의해 언급됐다는 사실은 좀더 흥미롭다.또 맘즈베리의 윌리엄은 이렇게 주장하는데:

 

Tunc,cantilena Rollandi inchoata ut martium viri exemplum pugnaturos accenderet,...praelium consertum...

(헤이스팅스에서)싸움이 시작될 때,전투의 열기를 더하기 위해 롤랑의 노래를 불렀고...

 

이 사료의 중요성은 좀더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다.이것은 맘즈베리의 윌리엄이 이 주장을 썼을 무렵-약 1125년쯤-그가 상정한 독자들이 이미 롤랑을 용기의 표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했을 것이며,1066년에 노르만군이 롤랑의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거라는 뜻이다.실제 헤이스팅스에서 그 노래가 불렸든 아니든 간에 이 기본적인 사실을 무너뜨리지는 못한다.더해서,캉의 랄프 또한 1118년쯤에 누구나 도릴라이움의 전투(1097)에서 플랑드르 백작과 베르망두아 백작의 위업을 본다면 롤랑과 올리비에가 다시 살아 돌아온 듯 여기게 될 거라고 적고 있다. 따라서, 맘스베리의 윌리엄이 어려서 1066년의 일들을 직접 겪은 어른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저서 '역사'에서 롤랑에 대한 노래와 헤이스팅스 전투를 연결지었다는 가정은 할 법하다. 그러나 한편 이 역사가들이 말하는 노래cantilena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롤랑의..>의 초기형태인지는 불분명하다. 물론 <롤랑의...>의 기원에 대해 자세히 토론하는 것은 이 논고의 한정적인 목적을 벗어나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은 보들리 도서관에 소장된 <롤랑의 노래>텍스트에 가까운 형태로 노래가 구성된 것은 11세기 후반(아마도 1080년과 1100년 사이)이며,이 모든 일은 1124년 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유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롤랑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롤랑의..>는 샤를마뉴가 778년에 겪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패배,그리고 그 테마를 가져와 11세기에 알맞게 변주한 이야기이며,그래서 '롤랑'이라는 인물에 대한 단서는 800년부터 1050년까지 흩어져 있는 데 비해 <롤랑의 노래>는 11세기 사람들에게 낯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앙주와 노르망디 공국이 위대했던 시절의 북프랑스 사회'의 정서라는 사실을 알면 충분하다.<롤랑의..>는 노래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그 시대를 지배했던 '성전'(프랑크인들이 스페인의 무슬림과 근동에 행하게 될)의 정서로 가득차 있다.심지어는 <롤랑의..>는 그때 살아 있었던 십자군 지도자들-자신들을 프랑크인Franci이라고 부르는-에게 신성한 소명과 초지역적 여정의 사명을 일깨우기 위해 구성됐을 가능성마저 있다.

노래가 탄생한 환경과 그 속성을 본다면,당시의,11세기 후반의 가장 빛나는 군사적 위업이 노래에 암시되어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롤랑의..>에서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을 암시한다고 보이는 대목은 두 가지가 있다.첫째는 샤를마뉴에 대한 블랑캉드랭의 연설이다.

 

"Merveilus hom est Charles,

Ki cunquist Puille e trestute Calabre,

Vers Engletere passat il la mer salse,

Ad oes seint Pere en cunquist le chevage."

 

"샤를마뉴는 진정 놀라운 남자요

칼라브리아와 풀리아를 정복했고

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로 가서

성 베드로를 위해 성금을 받았지"

 

두 번째 대목은 롤랑이 자신의 검에게 자신이 샤를마뉴를 위해 복무했던 일을 떠올리며 하는 말이다:

 

Jo l'en cunquis e Escoce e Irlande

E Engletere,que il teneit sa cambre.

나는 (황제를 위해)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그리고 황제가 침실cambre로 삼으신 잉글랜드를 정복해드렸네

 

물론 역사적 샤를마뉴는 잉글랜드에 왔던 적이 없고,브리튼 제도의 어느 곳도 정복하지 않았다.그러나 노르만인들은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정복했고,윌리엄은 짠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로 왔으며 로마로 '성 베드로를 위한'성금을 걷어 보냈다.(이것은 노르만인들이 잉글랜드 정복의 위업으로 가장 많이 선전했던 것이다.)또,윌리엄은 아일랜드를 정복했던 적 없지만,윌리엄의 후계들은 아일랜드에 대한 권한을 주장했으며,랑프랑 주교는 1074년에 벌써 더블린의 주교좌에 수위권을 행사하려 하고 있었다.스코틀랜드에 대해 말하자면,1072년 윌리엄의 군사 행동으로 맬컴 왕이 애버르니로 와 인질을 넘기고 윌리엄 왕에게 봉신이 될 것을 선서했다.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그 결과로 그의 침실cambre을 잉글랜드에 두고 있었는데 여기서 침실cambre는 제후가 곧바로 수입을 거두며 직접 재판권을 행사하는 직할령을 의미한다.그러나,<롤랑의..>에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에 대한 암시가 있다 치더라도,<롤랑의..>가 노르만인의 창작인지,아니면 노르만인의 위업들에 그저 영감을 받은 것뿐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으며,<롤랑의..>가 노르만 기원의 작품이라는 것은 과대 해석이라는 지적들이 있어 왔다.옥스포드 판본의 마지막 줄을 둘러싼 논쟁들 또한 이 의문에 답을 주기는 요원해 보인다.튀롤드Turold는 의심할 바 없이 스칸디나비아 기원의,즉 다른 어떤 프랑스 지방보다 노르망디적 성격에 맞는 이름이지만,전문가들은 Ci falt la geste que Turoldus declinet(튀롤두스가 declinet해서 남기노라)의 해석에 아직까지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튀롤두스가 관찰자로서의 자신을 이 작품에 포함하고 있는지 어떤지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롤랑의..>의 노르만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결실이 없으며,마찬가지로 11세기 유명인사들 중 튀롤두스라는 특정 인물을 찾아다니는 것 또한 그럴 것이다.

추론을 이끌어내기 전에 조심해야 할 비슷한 예는 또 있다.<롤랑의..>에 등장하는 노르망디 공작은 '늙은'리샤르로 지칭되는데,12세기 중반에는 10세기에 통치했던 리샤르 공작을 이렇게 지칭하는 일이 흔한 일이었다.(오데리쿠스 비탈리스에서는 공작을 senior 혹은 vetulus라고 가리킨다.)그러나 가장 두드러지는 예는 <롤랑의..>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구난의del Peril 생 미셸'일 것이다.이것이 노르망디의 생 미셸,바다의 재난에서 구해주는in periculo maris 성 미카엘에게 바쳐진 수도원을 뜻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리고 이 수도원은 966년에 늙은 리샤르 공작에 의해 재건립되었다)<롤랑의..>에서 심대한 역할을 맡고 있는 성 미카엘은 가장 유명한 노르망디 수도원의 수호 성인일뿐만 아니라 노르만인들이 즐겨 찾는 남이탈리아의 순례지 몬테 가르가노의 수호성인이기도 해서,노르만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성인이었다.그러나 한편으론,성 미카엘은 서유럽 전역에 걸쳐 널리 숭배되고 수도원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성 미카엘에 대한 저자의 헌신이 꼭 저자가 노르만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그럼에도,모든 여건을 갖춰서,이 모든 단서들을 한데 모아본다면,이 암시들이 좀더 시사적으로 보일지 모른다.망설이면서,연구자들은 노르망디뿐만 아니라 그 중에서도 특히 몽생미셸 수도원을 바로 이웃한 아브랑슈 지방에 주목했는데,튀롤두스라는 인명이 특히 흔했던 곳이다.

여기서 학자들은 앵글로-노르만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특히 흥미로울 주장을 했는데,<롤랑의..>와 같은 서사시의 저자는 후원자를 필요로 했을 것이고,만약 그 저자가 아브랑슈에 살았다면,바로 그 부근-예를 들면 바이외-에서 그 시대의 가장 명망있는 패트런을 찾았을 거라는 것이다.오도는 1049년에서 1097년까지 바이외의 주교였고, 1067년 후부터는 켄트의 백작을 겸하고 있었다.

바이외의 오도는 <롤랑의 노래>출처를 논할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물이다.오도는 동시대에 문학과 예술 장인들의 후원자로 이름 높았고 오도가 재직한 성당의 직물에는 오도가 장인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오도는 렌느의 마르보드,그리고 아마도 투르의 힐데베르트와 같은 학식 높은 성직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고,자신의 지출로 장래가 유망한 젊은 수도승들을 유럽의 중심 교육기관으로 보내곤 했다.오도는 <롤랑의..>의 중심 주제인 십자군 운동과도 깊이 관계를 맺고 있었고 죽어서는 팔레르모에 묻히기로 비정되어 있었다.이런저런 이유로,바이외 주교 오도의 역사적 위업과 론세바예스 고개에서 투르팽 주교가 행한 가상의 위업을 연결짓고 싶은 욕구가 생길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유사성은 보기보다 얄팍한 것이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어떤가.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묘사된 정경과 <롤랑의..>의 묘사를 연결짓기 위해,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제작 연대를 늦추려는 노력이 있었다.그러나 바이외 태피스트리-오도 주교의 명령하에 제작됐을-는 헤이스팅스 전투가 일어난 거의 직후에 제작에 착수됐을 것이 분명하다.반복해서,무리하게 확장시키려는 노력은 경계해야 하지만,만약 <롤랑의..>저자가 후원자를 찾고 있었다면,그 강력한 후보자 중 한 사람이 바이외 주교 오도라는 사실은 고려해봄직하다.그리고 물론,11세기 회화의 위대한 기념비적 작품(바이외 태피스트리)과 토착 프랑스어의 가장 위대한 서사시 둘 다 잉글랜드 정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과 연관되어있다는 주장은,아주 매력적이다.이 유혹적인 가설은 그러나(재차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추측의 영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좀 더 사실에 기반한 증거는 앵글로-노르만의 법문서들에 근거하고 있는데,아직 많은 연구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한 모양이다.어쨌든,<롤랑의...>의 몇몇 부분은 이러한 맥락 안에서 그 내용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데,전투의 참극을 애도하는 장면을 보자:

 

Cels qu'il unt mort,ben les poet hom priser,

Il est escrit es cartres e es brefs,

Co dit la geste,plus de .iiii. milliers.

(그들이 얼마나 죽였는지,그 수를 알 수 있으니

그것은 기록과cartres과 증서brefs로 남아 있나니

무훈시는 4천명이라고 이르고 있다네)

 

앵글로-노르만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은,이 부분을 <롤랑의...>이 집필되던 시기 앵글로-노르만 법전들에 결코 드물지 않은 어떤 용어와 대조해보고 싶을 것이다.이 대조는 아마 윌리엄 루푸스가 1093년부터 1100년까지 그의 아버지 정복왕에게서 그가 물려받은 특권들을 뷰리 수도원에 재확인시키는 문서에서 가장 빛날 것이다:

 

-sicut breves sui et cartae dirationantur.

(이처럼 그의 bref와 carte가 증명할 것이다.)

 

이 유사성은 충격적이다.루시앙 풀레가 <롤랑의..>의 프랑스 고어 bref를 단순히 '문자'로 옮겼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그 해석은 이해할만하지만, breve는 앵글로 노르만 법적 문서에서 행정적 목적으로 왕의 인장이 찍히고,왕실 필사실에서 발행되는 특정한 종류의 문서-'칙서'의 의미에 더 가깝다.이 형태의 칙서는 대체로 짧고 그 형식에서 엇비슷한데, 원래 노르만 정복 이전의 잉글랜드에서 발행되었지만 윌리엄 정복왕 후에도 이렇다할 고침 없이 그대로 발행됐다.이것은 좀더 공들이고 공공적인 성격의 다른 칙서(carte)와는 매우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더욱이 앵글로-노르만의 간이 칙서는 정규 왕실 비서진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발행되었는데 이것은 1066년과 1106년 사이에 앵글로-노르만 왕실 공문서실의 고유한 특징이었다.그러므로 풀레가 <롤랑의..>에서 했던 해석보다 성급히 더 많은 것을 도출해내려는 시도가 아직 이르기는 하지만,cartes와 brefs가 나란히 병치되어 대조되는 모습은 앵글로-노르만 왕국의 법적 문서들에 특이했던 용어 대조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면 1127년에 잉글랜드의 헨리 1세는 일리의 주교좌에 특정한 토지의 권리를 확인시켜 주면서 이렇게 적었다:

 

quas carta mea Wintonie de Thesauro meo testatur fuisse iuratas tempore patris mei ad feudum ecclesie de Ely

(윈체스터의 내 수장고에서 발행한 carta가 내 아버지 시절에 일리의 교회에 주어졌던 권리를 확인해 주리니)

 

다시 윌리엄 루푸스는 1094년과 1100년 사이에 한 영지를 흄의 성 베네딕트 수도원에 속한 것으로 선언하며 이렇게 쓴다:

 

ista terra inbreviata fuit in meis brevibus - qui sunt in thesauro meo Wyntoniae

(내 윈체스터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brevibus에 기록되어 있고)

 

칙서cartae와 간이칙서breves는 둠즈데이 북을 편찬하는데도 참고 자료로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으며,둠즈데이 북 그 자체도 편집 과정에서 칙서cartae와 간이칙서breves를 병행 사용했을 가능성이 암시되어 있다.그렇든 그렇지 않든 간에,여기서 칙서cartae와 간이 칙서breves를 활용하는 방식이 롤랑의 서사시에서 활용되는 것과 같은 용법이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보인다.이러한 칙서와 간이칙서의 병행사용은 1066년과 1100년 사이에 잉글랜드 외의 다른 서유럽에서는 적절하게 들어맞는 사례가 없다.

이런 몇 가지 암시와 단서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롤랑의 노래>가 노르만 기원이라는 추측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어주고 있다.그러나,이 추측은 단서뿐만 아니라 그 추측이 뒷받침하는 고려 사항이,이러한 결론을 내리기에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한다.대체로,<롤랑의 노래>를 논한 문학 사가들은 노르망디와 롤랑 서사시 간의 관계에 회의적이었다.그 지적에는 일리가 있는데,예를 들자면,<롤랑의...>에 등장하는 노르만인들은 오직 수 많은 여러 지방인들 중 한 집단일 뿐이며,마지막 프랑크인과 무슬림들 사이 벌어진 대전투에서는 선봉과 후위를 합쳐 5개 부대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거기다 <롤랑의...>는 전체적으로 강한 프랑스를 향한 애국심을 드러내고 있다.샤를마뉴의 칼은 '프랑스의 검'이며,황제는 '프랑스의 왕'이다.그는 아름다운 프랑스 땅la douce France-la Terre majeure을 대표하여 싸우고 롤랑은 프랑스인들 중에서 가장 프랑스인다운Franc de France전사이며 프랑스를 욕되게 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그러므로 베디에는 이렇게 묻는다:

 

Si l'auteur est un Normand,comment a-t-il pu imaginer une telle fiction, representer son pays comme une terre annexee a l'Empire, et qu'un Franc de France aurait reduite par la force?

(만약 <롤랑의 노래>저자가 노르만만인이라면,어떻게 자기 고장을 황제나 롤랑에게 제패되고 병합된 땅으로 상상할 수 있었을까?)

 

베디에의 결론은 이렇다:

 

Il se peut,malgre les doutes ci-dessus marques,qu il soit un Normand de Normandie ou d'Angleterre, le nomme Turold;et aussi bien qu'il soit un Francais de I'il de France;et aussi bien qu'il soit un Champenois,un Angevin,un Lorrain. Une seule chose est sure-qu'il s'adresse a un public plus large que celui d'une province.

(모든 의심에도 불구하고-자신을 튀롤두스로 칭하는 이 사람은,노르망디인일 수도 잉글랜드인일 수도,일 드 프랑스의 프랑스인일 수도,샹파뉴인일 수도 앙주 사람일 수도,로렌 사람일 수도 있다.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저자는 이 서사시의 청자로 어느 한 지방의 사람들보다 더 큰 단위의 공공 대중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드몽 파랄 또한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Il suffira sans doute de constater simplement que ses sentiments etaient ceux d'un francais(이 노래의 정서가 의심할 바 없이 프랑스인의 그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페르디낭 로트는 한술 더 뜬다.본질적으로 <롤랑의...>가 어디 창작물이건 간에 바이킹의 지방에서는 그런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Historiquement,psychologiquement,il est impossible que la Chanson de Roland soit due a un Normand.(역사적인 면으로 보나 심리학적 면에서 보나 <롤랑의 노래>는 노르망디 것일 수가 없다)

이러한 의견들은 진실이며,가벼이 취급될 것도 아니다.만일, 11세기 노르망디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그 이후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이 주장들은 두 가지 질문에 정면으로 노출되어 있다.먼저,<롤랑의...>창작 시기에 노르망디에는 이러한 종류의 노래가 나올 만한 식자 그룹이 존재했는가?두 번째로,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노르만 저자가<롤랑의 노래>에 나타난 것과 같은 감정 표현들과 애국적 개념들을 사용했을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고려하자면,<롤랑의 노래>가 성직자 집단에서 나왔다는 설은 이제 거의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달리 말하자면,<롤랑의...>저자는 종글뢰르(음유시인)이기보다는 수도승이라는 것이며,식자 계층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자국와 문학과 라틴어 문학 사이에 가상의 구분선을 세울 필요는 없으며,<롤랑의 노래>는 매우 라틴어 문헌에 친숙한 시인이 틀을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롤랑의...>창작 시기에 그러한 그룹은 틀림없이 노르망디에 존재했다.게스타 윌렐미Gesta Willelmi는 1075년 전에 완성됐고,저자인 기욤 푸아티에는 <롤랑의..>에 보이는 것과 같은 유의 글쓰기를 구사한 훌륭한 표본이다.기욤 푸아티에는 영웅을 강조하고,살루티우스와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의 모델을 따를 정도로 고전적이며 크세르크세스에서 트로이에 걸친 고전 소재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대서사시류의 고양된 표현을 사용하며 이미 무훈시Chansons de Geste에 속하는 많은 다른 작품들의 저자였다.이러한 이유로 기욤 푸아티에의 가장 최근 판본은 그를 '에픽 레전드의 창조자'라고 표현했다.

때때로 동시대 노르만 작가들의 서술에서 <롤랑의 노래>와 거의 같은 카덴차가 감지되기도 한다.오데리쿠스 비탈리스의 작가는,보에몽을 롤랑에 비유하며, 죽어가는 기스카르가 이렇게 말하게 만든다:

 

Recolite quam magna Normanni Fecere,et quod parentes nostri Francis et Britonibus et Cenomannensibus multoties restitere,et fortiter vicere.Ad mentem reducite quam magna me duce gessistis in Italia et Sicilia. Psalerniam et Barrum,Brundisium et Tarentum,Bismannum et Regium,Syracusam et Palernum obtinuistis.

(강대한 노르만인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라.우리 아버지들이 프랑크인들과 브르타뉴인들과 앙주 사람들과 몇 번이나 싸워 왔는지,그리고 어떻게 용감히 그들을 패배시켰는지.내 부탁이니,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네가 행했던 위업들을 기억해내라.너는 살레르노와 바리를,타란토와 비쟈노와 레지오를,시라쿠사와 팔레르모를 정복했다...)

 

'풍요로운 불가리아'또한 그의 무공에 함락되지 않았던가?또 이 모든 것을 '성스러운 소업'을 위한 성취라고 부른다.이런 류의 서술은 <롤랑의 노래>를 떠올리게 만든다.

 

Ki cunquist Puille et trestute Calabre,(대왕은 아풀리아를 정복했고 풍요로운 칼라브리아를 점령했으며..)

 

롤랑이 죽어가며 말하는 대목 또한 마찬가지다:

 

Encuntre mei revelrunt li Seisne

E Hungre e Burgre e tante gent aversc,

Romain,Puillain et tuit icil de Palerne.

 

이러한 매력적인 대조는 롤랑의 이야기가 이미 유명해서 노르망디 땅 바깥 귀족들도 자식들의 이름을 롤랑으로 짓고는 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만든다.앵글로-노르만 왕국에서 이런 열정은 한층 더해서 귀족뿐만 아니라 그보다 낮은 계층의 집안에도 퍼져 있었다.예를 들어,12세기 중반에 템플러에게서 와딩햄의 토지를 임차한 링컨셔의 농꾼은 Rollant pro i tofto de dono Oliveri fratris eius xii den(롤랑이 그의 형제 올리비에에게 12데나리우스를)라고 기록되었다.1185년의 기록이므로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 1160년 이후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이 기록이 <롤랑의...>의 연대에 비추어 좀 늦은 증언이기는 하다.그러나 만약 <오데리쿠스..>의 저자가 <롤랑의 노래>를 현재의 형태로 써냈다면,기욤 푸아티에가 그전에 썼을 가능성도 있다.기욤 푸아티에는 잉글랜드 정복 후의 참상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Diligeres,ac maxime haberes eum et tu,Anglica terra,totam que te eius pedibus laeta prosterneres,si abesset imprudentia atque iniquitas tua,quo meliore consilio dijudicare posses in qualis viri potestatem deveneris-Huius milites Normanni possident Apuliam,devicere Siciliam,propugnant Constantinoplim,ingerunt metum Babyloni.

(그리고 무엇보다도 잉글랜드의 산하여,네 주인을 아끼고,그의 발 아래 엎드리도록 해라.편견과 아집을 버리고 우수한 점들을 보도록 하여라..노르만의 군사들은 아풀리아를 정복하고,시칠리아를 굴복시켰고,콘스탄티노플에 대적했고 바빌론에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노르만 연대기 작가들의 수사를 롤랑이 자신의 검에 말을 거는 대목에 가져다 대는 것이 그저 허황된 작업일까?

 

Jo l'en cunquis e Anjou e Bretaigne,

Si l'en cunquis e Peitou e le Maine,

Jo l'en cunquis Normendie l franche,

Si l'en cunquis Provence e Equitaigne,

E lumbardie e trestutue Romaine,

Jo l'en cunquis Baiver' e tute Flandres

E Burguigne et trestute Puillanie

Costentinnoble,dunt il out la fiance.

(나는 그에게 앙주와 브르타뉴를,

푸아투와 멘을 정복해드렸고,

자유로운 노르망디를,또 프로방스와 아키텐을,

롬바르디아와,로마냐 전역을,

바이에른과 플랑드르 전체를,

또 부르고뉴와 아풀리아 전부를 정복했고,

콘스탄티노플은 황제에게 봉신이 되었네)

 

이런 성격의 서술이 작품 내내 지속되며,각자 두 다른 언어로,서로 다른 문학적 장르 안에서 쓰여진 말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그렇다.

그러나,11세기에 노르망디에서 <롤랑의...>같은 문학적 성격을 가진 서사시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그 결론은 '<롤랑의 노래>에 중심적인 프랑스에 대한 향수를 과연 그 시대의 노르만인이 표현해낼 수 있었을까'는 의문에는 대답해 주지 못한다.그런데 이 의문 자체가 사실 좀 검증이 필요하다.베디에 이후 누구도,<롤랑의 노래>가 그 기본 정서가 프랑스적이며 언어가 프랑스적이고,본질적으로 프랑스인 천재에 의한 산물이라는 점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던 것이다.그럼에도,노르만인이 <롤랑의...>에 표현된 놀랄 만한 애국심에 어떤 정서를 가졌을까 의심하기 전에,대체 <롤랑의...>에서 말하는 아름다운 프랑스douce France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밀함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롤랑의...>에서 프랑스란 샤를마뉴,프랑스의 왕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바이에른과 플랑드르 봉신들을 가졌고,엑스 라 샤펠(쾰른)에 수도를 두었으며 앙주와 브르타뉴,프로방스와 아퀴텐,그리고 심지어 '노르망디'마저도 정복했던 황제의 땅인 것이다.이 윤곽을 따라가다 보면,이 시에서 가리키는 '프랑스'란 사실 매우 한정된 공간임을-몽생미셸에서 크산텐까지,그리고 브장송에서 위쌍까지-알 수 있다.이것이 '프랑스 중에서도 프랑스'인 땅이며,이것은 라옹에 실질적인 수도를 두고 있었던 10세기의 카롤링 왕가의 토지-'바다 건너에서 온 루이'가 프랑스의 왕이던 때와-와 거의 일치한다.노르망디는 물론,바이킹의 땅이었지만,그 공작가는 황제의 권한으로 승인되었으며 세례로 축성되었다.거기에다,10세기 초에 노르망디의 기욤 장검공은 황제와 정치적으로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장검공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대전사로 일컬었고 '바다 건너에서 온 루이'의 충성스런 옹호자를 자처했다.실제,장검공의 후반생이 그러한 주장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942년에 그는 황제(루이)를 루앙에서 정중하게 맞이했으며,그해가 끝나기 전 루이의 적대자에 의해 센 강의 섬에서 살해당했다.

장검공 시대의 몇몇 연대기 작가들,예를 들자면 랭스의 리셔와 같은 사람들은 성급하게 갈리아의 봉신들이 왕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장검공을 암살했다고 추측했다.즉,이 사람들이 보기에 노르망디 공작의 샤를마뉴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이 '10세기의 가장 유명한 암살 사건'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장검공을 충실한 봉신이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그리고 그가 결코 가진 적 없었던 덕성을 갖춘 인물로 바라보는 그러한 해석이,맞는지 틀리는지 따지는 것이 현재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이 논고의 목적은,장검공을 그런 인물로 윤색한 주장이 노르망디에서 어떤 정도로 받아들여졌는지,그리고 그 믿음이 지속됐는지를 검토하는 것에 있다.다행히도,우리에겐 명확한 증거가 있다.기욤 장검공이 암살된 거의 직후,적어도 10세기가 끝나기 전의 어느 시점에,장검공을 기리기 위한 라틴어 만가가 있었다.이 만가는 장검공을 그리스도의 용사이며 황제에 충성한 순교자라는 해석을 따라 지어졌다.가사 중 장검공을 그리스도의 용사로 보는 대목은:

 

Moriente infideles suo patre

Surrexerunt contra eum bellicose;

Quos,confisus Deo valde,sibi ipse

Subjugavit dextra forte.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

믿음 없는 자들이 그에 맞서 전쟁을 일으키니

믿음 강건한 공작은

막대한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프랑스의 왕이자 황제에게 충성스러운 봉신으로서의 장검공은:

 

Hic audacer olim regem Hcludovicum

Sibi fecit seniorem regnaturum

Ut cum eo superaret hostem suum

Regnaretque regum more.

(한때 공작은 루이를 그의 주군으로 받들고

 왕의 적들은 억눌러

왕이 그의 뜻대로 통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장검공의 죽음은 진정한 손실이자 슬픔인데:

 

Cuncti flete pro Willelmo

Innocente inerfecto.

(모든 이

죄 없이 죽은

기욤을 위해 이리 눈물흘리노라)

 

이 만가가 분출하는 애감,그 성격과 창작연대도 놀랍지만,노르망디에서 이 만가의 정서가 얼마나 오래 살아남았는지 또한 놀랍다.그 전통은 장검공과 특히 연이 깊었던 쥐미에주에서 계속 살아남았으며,<롤랑의 노래>가 창작될 시기에 연대기 작가 쥐미에주의 기욤은,장검공의 사건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은유들을 쓰곤 했다.이러한 관행들은 와스에 의해서도 변용을 거치며 재생산되었다.이 사실은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장검공의 비가에 있는 정서는 거의 <롤랑의 노래>의 그것과 분명히 같은 타입이기 때문이다.물론,노르망디의 혈맹은 시간을 거치며 카롤링 왕조에서 카페 왕조로 옮겨가게 되었고,노르만과 카페 왕조는 11세기의 이른 시기에 서로 많은 것을 빚지며 살아왔다.그러나 1053년 이후로,노르망디와 카페 왕조는 상호이익에서 매우 날카롭게 어긋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1204년까지 지속되었다.

푸아티에의 기욤이 저술한 연대기들에서 보이는 강한 노르만 제일주의도 물론,카페 왕조의 앙리1세에 대한 적대감으로 일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이러한 적대감은 사실은 노르망디공을 황제와 그 후계자들의 충실한 지지자로 그리는 전통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카페 왕조는 카롤링엔 황제의 가계를 대체한 가계였기 때문에)

사실,이렇게 되면 11세기의 노르만인들이 자신을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의미의 프랑스인Francus으로 지칭하는 데 별로 주저하지 않았으리라는 결론을 회피하기가 불가능하다.이것은 단지 흥미로운 추론이 아니다.

이 시기의 법적문서 또한 그 사실을 확인해준다.1066년부타 1087년까지 정복왕 윌리엄이 발행한 여러 공적 문서에서 대륙에서 건너온 자신의 봉신들을 노르만이라 지칭한 예는 상대적으로 드물다.윌리엄의 헌장에서 그 봉신들은 보통 onmibus fidelibus suis Francis et Anglis(모든 그의 충실한 프랑스인과 잉글랜드인 봉신들)이라 지칭된다.짧게 말해,노르만인과 프랑스인 사이의 엄격한 구분선은 11세기 후반의 상황에 비춰봤을 때 무너져내린다.문학적 사료와 법적 사료 모두 이 시대의 그같은 구분이 가상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면 여기에는 마지막 한 가지 질문만 남는다.11세기에,스페인과 근동을 향한'성전'을 촉발시켰고,<롤랑의 노래>에서는 프랑크인들의 '특별한 사명'으로 묘사되었던 종교적 정서에,가장 최근까지 이교도였던 노르만인들이 얼마나 경도되었을까?초기의 스페인 원정들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지만,괄목할 만한 시대적 운동이었으며 노르만인들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향한 레콩키스타 원정 중 거의 첫 번째로 기록된 사례는 로제르가 지휘한 군사 행동인데,이 로제르라는 인물은 거의 틀림없이 토스니의 로제르 1세이며 노르만 역사에 그 위업이 잘 남겨져있다.로제르는 노르망디의 그의 공작령으로 돌아온 후 '스페인의 로제르'혹은 '스페인인'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1035년 로제르는 샤티용 수도원이라고도 불리는 콩셰 수도원을 창설했고,1039년 쯤에 보몽의 로제르와 전쟁을 벌이다 사망했다.로제르에 대한 전기 중 좀 덜 믿음직한 기록에서는,로제르가 샤티용-콩셰 수도원에 성 푸아의 성유물을 가지고 왔다고 하며,여기에 그 성유물은 사실 로제르가 스페인에서 돌아오며 루에르주의 콩크에 있는 생트푸아 수도원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존재했다.

그러므로,콩셰라는 이름은,이 사실로 설명될지 모른다. 12세기 초기에 콩크의 생트푸아 수도원은 론세바예스로 가는 길목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최후로,이 이야기에는 아직 얘기하지 않은 저간의 사정이 더 있다.'스페인인'토스니의 로제르의 최후를 묘사함에 있어 오데리쿠스 비탈리스에서는 그와 함께 그의 아들인 '앨베르Elber'와 '앨리낭Elinance'이 죽었다고 적고 있다.그러나,계보학자들의 시선을 끌었던 로제르의 가계도에는 앨베르나 앨리낭 같은 이름은 없다.이 이름들은 노르망디에서는 성명으로 쓰이지 않은 미지의 이름이었는데,실은 무훈시-샹송 드 제스트 장르에 흔한,두운을 맞추기 위해 등장하는 가상의 이름의 전형적인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또한 로제르의 업적은 노르망디와,스페인의 이교도들을 향한 성전 초기의 관계를 시사한다.

1064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르바스트로 원정의 전후사정은 더욱 흥미롭다.이 원정은 <롤랑의 노래>에 소재를 제공했다고 여겨지는 원정들 중의 하나였다.교황 알렉산데르 2세가 후원했고,푸아티에의 조프루아가 지도자였지만,노르만인들은 이 원정에 깊게 관여했다.푸아티에의 막성스의 연대기 저자 스스로가 이렇게 지적한다:abiens in Hispaniam cum multis Normannis Berbastrum civitatem nomini Christiano...adquisivit. 심지어 노르만인들은 푸아티에 출신 연대기 작가가 기록했던 것보다 더 큰 역할을 떠맡았을 가능성마저 있다.무슬림 측 연대기에서는 이 원정을 마치 오롯이 노르만인들의 원정인 것처럼 서술했던 것이다.또,이 군사 행동의 자세한 사항들은 거의 불분명하지만,노르만인들이 깊게 관여한 이 원정이-헤이스팅스 전투보다 2년 앞서 일어났다고 여겨진다-기독교인들이 성전의 명목으로 스페인에서 거둔 괄목할 만한 첫번째 승리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에게 좀더 친숙할 동쪽을 향한 십자군 운동 또한 같은 결론을,비슷하게 혹은 좀더 강하게 적용할 수 있다.여러 동기가 얽혀 있긴 했지만,노르만인들의 시칠리아 정복은 11세기에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에 거둔 첫번째 중요한 승리로 귀결지어졌으며,1068년에 로제르 크레스팽과 루셀 드 바이욀 같은 노르만 기사들이 이미 동방 황제에 봉사하며 투르크인들에 대항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최후로,갈리아에서 대부분 그 추진력을 얻었던 제1차 십자군 전쟁 자체도,잘 알려진 바대로 노르만인들이 특히 돋보였다.1차 십자군의 주요한 여덟 지도자 중 네 명은 노르만인이었고,또 다른 한 명은 아내가 노르만인이였다.만약 십자군 전쟁이,17세기의 관용구처럼,프랑스인들을 통한 신의 업적Gesta Dei per Francos으로 표현될 수 있다면,노르만인이 여기서-프랑스가 신성한 사명을 구현하는 과정에서-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해야 합당할 것이다.

11세기의 노르만인들이 '성전'의 개념을 매우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서도 그 개념을 남용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노르만의 영국 정복은 <롤랑의 노래>에 영감을 준 일련의 사건들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해를 더해가며 성전의 테마들은 강조되었다.1062년과 1063년 사이에 알렉산데르 2세 교황은 시칠리아에서 싸우는 노르만 기사들을 축성하고,교황기를 보내주었으며 1064년에 노르만인들은 바르바스트로의 '십자군 원정'에서 크게 활약했다.1066년에 교황은 영국 원정을 떠나는 정복왕에게 교황기와 성물을 주었고 이 사업적 모험에 더해진 '성전'의 색채는 노르만인들의 프로파간다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다.4년 후,윌리엄 정복왕은 윈체스터에서 위와 같은 성물로 자신이 교황의 대행자임을 주장했고,1071년에는 노르만 기사들이 만지케르트에서 투르크인들을 상대로 싸웠다.1072년,정복왕이 스코틀랜드로 향했을 때,시칠리아에서는 탕크레드의 아들인 로제르가 사라센인들로부터 팔레르모를 탈환했다.1차 십자군 원정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군사행동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노르만인들이 같은 시대를 살았을 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친척이며 형제라는 친족의식을 공유하고 있었고,또 군사적 행동에서나 일반행동에서나 같은 영적 개념을 공유했다는 사실은 강조가 필요하다.이 시기 노르만 세계의 연대는 실존하는 것이었다.쿠탕스의 조프루아나 바이외의 오도 같은 노르만 성직자들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 친족들이 고향에 성당을 지어 달라고 보내오는 성금을 받았으며 시칠리아의 수도원들에서 노르만의 성인이(Evroul) 주님께로 승천했다는 성가가 불려진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했다.루앙이,'두 번째 로마'이자 제국의 수도로서 아무 이유 없이 찬양받은 것은 아닌 셈이다.노르만인들은,루앙을 그들의 수도로 선택했으며 그로부터 나와서 다른 토지들을 복속시키러 갔다는 것이 레토릭이었다.브르타뉴와 잉글랜드,스코틀랜드와 웨일즈가 복속되었고,루앙의 또 다른 아들들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아프리카,그리스와 시리아'의 주인이 되었다.이것은 12세기 중반의 정서이긴 했지만,그전의 전통에서도 유사한 정서를 찾아볼 수 있다.전해지길,정복왕은 로베르 기스카르의 위업을 되새기며 용기를 다졌다고 하며,정복왕이 죽기 전에는 루앙에서 주조된 화폐가 남이탈리아에서 유통되었다.분명히,11세기에 노르만 세계는 실존태로 현존했고,노르만인들은 그리스도의 임무를 실행한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으며,이미 애버네시에서 시라쿠사까지,그리고 바르바스트로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또 브르타뉴에서 토로스까지 명성 자자한 자신들의 군사적 재능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노르만인들의 활동으로 연결된 지역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 카페 왕조가 아직 얻으려고 분투하는 것들에 비해서 더 컸고-그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들은 롤랑이 전설에 나오는 황제를 위해서 뒤랑달로 얻은 영토들에 더 근접했다:

 

...Carlemagne,ki est canuz e vielz,

Men escientre dous cenz anz ad e mielz;

Par tantes teres ad sun cors traveillet,

Tanz cols ad pris de lances e d'espiet

Tanz riches reis conduiz a mendistiet.

(...샤를마뉴는 백발이며 노인이고,

내가 듣기로는 이백 살이며 그보다 더하다고 하오.

수많은 땅들을 정복하며 넘어다녔고,

수많은 검창들을 맞아 싸웠으며

수많은 부유한 왕들을 구걸하게 만들었다고...)

 

그리고 샤를,신의 축복을 받아 영적인 임무에 전념하는 황제는 롤랑과 나란히 <롤랑의...>에서 영웅이다.<롤랑의 노래>에서,롤랑은 노래가 불과 2/3정도 왔을 때 사망하지만,샤를마뉴는 노래의 가장 첫 번째 문장에서 등장하고, 끝날 때도,노래는 선과 악의 끊임없는 싸움과 황제의 끝나지 않는 수고로움을 환기시키며 끝난다.샤를마뉴는 초인간적으로 나이를 먹었고,초인간적으로 신성한 사람이며,가브리엘 천사는 그가 잘 때 황제를 굽어보며,그가 싸울 때는 신의 천사가 함께 간다.더욱이,샤를은 왕이라기보다는 성직자에 더 가깝다.샤를마뉴는 십자가를 그리는 성직자의 특징적인 축복을 나눠주며,성직자만이 할 수 있는 면죄 선언을 한다.<롤랑의...>가 창작될 시기에,성직자-왕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가장 열성적이었던 것은 노르만인들이었으므로,이 발상 또한 거기에 기원을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요크의 무명저자'의 것으로 여겨지던 유명한 논고는 의심할 바 없이 11세기 후반기의 것이다.이것들은 요크 주재의 노르만 성직자들 혹은 루앙의 노르만 성직자에 의해 쓰여졌을 것인데,누가 저자이거나 기본적으로 노르만인의 저작물이며 ,그 내용에서,잘 알려진 대로,왕의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성스러운 자질'이 전례 없이 강조되어 있다. 도유를 통해,왕은 성스러운 존재로 탈바꿈하고,그는 그리스도교적 지도자가 되며 성인이 된다.심지어,왕의 직위는 신의 권위 그 자체의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서임식 경쟁과 관련된 논란들을 생각하면,이 비유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다.그럼에도,여전히,이 노르만인의 논고와 <롤랑의 노래>는 언뜻 전혀 관계가 없는 듯 보이지만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범위에서 그 뜻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거듭 강조하지만,이 소론은 그저 현재의 앵글로-노르만사 연구가 <롤랑의 노래>에 기능적인 비평을 제공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검토하기 위해 쓰여졌다.<롤랑의 노래>가 노르만 기원이라는 주장을 세우기 위해 얼핏 서로 반대되는 논거들을 통합하고, 기존의 논거를 전에 논한 바 없는 구도로 배치하고, 차후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비판받을 여지가 없지 않은 논거를 끌어온 것처럼 보였다면 양해를 구한다. 이 역사적 사료에 대한 재검토가 상당히 논쟁적인 이 주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연구가들이,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자세로 연구에 임할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지나치게 성급한 일일 것이다. 필자는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학생들이 더 이상 <롤랑의 노래>를 도외시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로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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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카라콜Caracole 항목

근세사 2020. 6. 24. 10:08 Posted by medievalart_kr

카라콜(스페인어로 '달팽이')은 승마술에서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반회전하는 동작을 뜻하며,과거에는 전술적 기동으로도 쓰였다.

 

카라콜 기동은 마상에서 원거리 무기를 사용하는 기병의 역사만큼 오래됐다.스키타이인과 파르티아인이 이 기동을 사용했다고 여겨지며,고대 이베리아인 또한 '칸타브리안 회전'으로 불리는 카라콜 기동의 일종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또한 13세기에는 징기스칸의 몽골군이 카라콜 기동을 한것이 확인되고 한족왕조의 군대들은 훨씬 이전부터 이것을 사용해왔다.16세기 중반에는 유럽의 군대들도 휴대용 화기와 기병전술을 융합하려는 시도로 이것을 받아들였다.최대 12열을 이룬 기병은 휠락 피스톨 혹은 그와 비슷한 화기로 무장하고 1열씩 갤롭으로 목표물에 가까이 다가가 마상에서 반회전하며 한쪽 권총을 발포하고,다시 반전해 남은 한쪽 권총을 발포를 마치면 원래 편대로 돌아가 재장전한다.카라콜 기병들의 대형은 공세를 위해 앞으로 움직이던가,적의 전진을 피하기 위해 천천히 뒤로 움직일 수 있었다.복잡한 기동에도 불구하고 대형은 밀집에 가까운 대형을 유지했고 카라콜 기동이 끝난 후에는 돌격할 것이 요구되었다.이러한 전술은 1540년경에 독일 라이터(기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전술은 자주 효과적인 것처럼 상찬받았으나-예를 들자면 감보아의 돈 페드로 휘하의 스페인 권총기병들이 스코틀랜드의 파이크 보병을 격퇴한 핑키 클루그 전투나 독일 카라콜 기병이 스위스 파이크보병의 진형을 무너뜨린 드뢰 전투처럼-카라콜의 효과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마이클 로버츠와 같은 역사학자들은 카라콜 전술의 쇠퇴를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와 연결짓는다.분명히 구스타브 아돌프는 카라콜 전술이 쓸모없다고 간주하고,스웨덴 기병들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기병들이 그런 것처럼 그냥 돌격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느리게 잡아도 1580년경부터 카라콜 전술이 쇠퇴했다는 증거가 충분히 많다.예를 들어,앙리 4세는 위그노 기병들과 네덜란드 중기병들에게 카라콜 전술을 버릴 것을 요구했다.

프랑수아 드라누아에 따르면,앙리4세는 권총으로 무장한 기병들이 일제사격 후 그대로 일제 돌격할 것을 지시했다.깊은 12열의 대형은 (고전적인 장창기병의 돌격진형에 가까운)6열로 줄어들었고 카라콜 기병을 지칭하는 '라이터'는 '큐레시어'로 대체되었다. 이따끔 사기가 낮은 카라콜 기병들이 사격 후 돌격하는 대신 반회전해 되돌아왔다고 여겨지지만,중요한 것은 이 지시에서 반회전을 통해 사격하는 행동은 완전히 빠져 있다는 것이다.

카라콜 전술은 대기병전에는 드물게 사용됐으며,맞돌격으로 이 기동은 손쉽게 상쇄될 수 있었다.

카라콜이 기병 대 기병으로 사용됐다는 마지막 기록은 1610년의 쿠르시노 전투Battle of Klushino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폴란드 후사리아의 돌격이 러시아의 카라콜 기병에 완승을 거뒀으며 이것이 러시아군 전체의 궤주로 이어졌다.400명의 스페인 창기병이 2000명의 네덜란드군의 독일 카라콜 기병에 돌격해서,아직 장전중인 독일 기병의 2열을 손쉽게 패퇴시킨 1574년의 모케르헤이데 전투는 공격적인 적 기병에 카라콜 전술이 무익하다는 것을 보인 또 다른 실례이다.(주목할 만한 점은 20년 후,네덜란드군 중기병이 바로 그 스페인 창기병을 튀른하우트와 니우포르트에서 패퇴시켰다는 사실이다.찰스 오만에 따르면 이것이 1603년 스페인 장창병의 해체를 불러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라콜 전술의 배리에이션은 17세기에도 대기병 전술로서 널리 사용됐다.1626년의 그니에브 전투에서 아보라모비치가 이끈 폴란드 경기병은 이 변형 카라콜 전술로 두 번의 성공을 거뒀는데,스웨덴 기병대에 1열씩 사격을 하고,재장전을 위해 되돌아가는 대신 그대로 사브르 돌격을 했다.아보라모비치는 나중에 후사리아 중기병대를 섞는 방식으로 카라콜 부대를 활용했다.

또한 16세기와 17세기 사료들은 카라콜을 현대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예를 들어 존 크루소는 카라콜을 적 부대의 돌격을 받은 중기병대가 우회를 통해 적을 함정에 빠트리는 기동을 카라콜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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